올림픽과 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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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농구


미국에서 탄생된 농구경기는 한 국가의 스포츠로 시작하여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하게 되었다. 농구경기와 올림픽과의 인연은 1932년 제10회 LA올림픽대회 때 국제농구연맹(FIBA)이 창설되고 이를 계기로 통일된 경기 규칙이 마련되어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 때 남자종목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농구경기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소개 된 것은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대회에서이다. 이 대회에서 농구경기는 미국 선수들에 의해 시범경기(demonstrationevent)로 소개되면서 미주 지역만이 아니라 유럽,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여러 나라에 걸쳐 흥미 있는 게임으로 성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동안 올림픽 대회에서의 농구경기는 남자에게 국한된 게임이었으나 여자 경기는 남자 경기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후로부터 40년 뒤인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대회 때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60년 로마 올림픽, 1964년 東京 올림픽, 1968년 멕시코 올림픽대회 때까지는 올림픽에서의 농구는 탄생지인 미국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1952년 헬싱키 올림픽대회부터 출전하여 줄곧 2위를 차지하고 있던 소련이 1972년 뮌헨 올림픽대회에서 미국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함으로써 미국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대회에서 다시 세계 정상을 차지하면서 명실상부한 세계농구의 맹주임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자존심은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대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지켜졌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에 출전한 미국 팀은 소련에게 결승전에서 어이없이 지고 말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농구협회와 NBA는 다시 농구에 있어서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NBA선수들을 올림픽에 출전시켰다. 1992년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 칼 말론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출전한 드림팀은 마치 상대를 가지고 놀듯 손쉽게 우승을 거두었다.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레지 밀러 등이 활약한 제2차 드림팀 또한 쉽게 우승을 거두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는 샤킬 오닐, 칼 말론, 리 미국의 주전 가드 배런 데이비스가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서 종료 직전 동료 마이클 핀리(맨 왼쪽)에게 파울이 선언돼 패배가 확정되자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치먼드 등이 출전하여 우승을 거두어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였다. 알론조 모닝, 빈스 카터, 게리 페이튼 등 제4차 드림팀이 출전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대회에도 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개성이 강한 스타들의 개인적인 행동(대회기간 내내 술집파동)과 2점차 경기운영, 지나친 쇼맨십 등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록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하였지만 미국의 드림팀은 팬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결국 NBA 사무국은 드림팀은 더 이상 없을 것이란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팀은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여전히 드림팀을 출전시켰고, 결과는 아르헨티나와 유고에 연패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예측컨대 미국은 또 다시 자존심 회복차원에서 최강의 농구 드림팀을 결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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